1924–1957 · 『시간의 역사』 연계

괴팅겐

양자역학을 만든 사람들은 왜 흩어졌는가

막스 보른을 따라 양자역학의 탄생과 추방, 전쟁과 핵시대, 그리고 전후의 반핵 선언까지 읽는다.

◆ 막스 보른 중심축 양자역학 천체물리 삶의 단절 핵개발 역사 ★ 『시간의 역사』 등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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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른만 따라가면

막스 보른을 중심에 놓으면, 양자역학은 몇 개의 방정식이 아니라 탄생·논쟁·추방·핵시대·반핵운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인간사로 보이기 시작한다.

1924
‘양자역학’이라는 이름
1925
하이젠베르크의 새 물리를 알아보고 수학적 구조 정식화
1926
슈뢰딩거 파동함수에 ‘확률’이라는 의미 부여
1926
아인슈타인에게서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1927
솔베이 회의에서 하이젠베르크와 공동 주보고
1933
괴팅겐 교수직에서 쫓겨남
1936
에든버러에 정착
1954
28년 만에 확률해석으로 노벨물리학상
1955–57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괴팅겐 18인 선언
한 사람이 양자역학의 탄생·논쟁·추방·핵시대·반핵운동을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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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지던 시기 · 1924–1928

시점영역사건
1924.6양자역학보른, 논문 제목에 ‘양자역학(Quantenmechanik)’이라는 표현을 사용
1925.1양자역학★파울리, 배타원리
1925.6양자역학하이젠베르크, 헬골란트. 관측 가능한 양만을 이용해 원자 문제를 다시 구성
1925.7.29양자역학◆ 하이젠베르크 논문 접수. 보른이 그 중요성을 알아보고 학술지 출판을 추진
1925.9.27양자역학보른–요르단, 교환관계 pq−qp=h/2πi 정식화. 훗날 보른의 묘비에도 새겨진 식
1925.11양자역학★디랙, 같은 구조를 푸아송 괄호와 연결해 독자적으로 정식화
1926.1.27양자역학슈뢰딩거 파동방정식
1926.6.25양자역학보른의 확률해석. 파동함수를 입자의 실제 물질파가 아니라 확률진폭으로 읽는 전환
1926.12.4양자역학◆ ★아인슈타인 → 보른: “그분(der Alte)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1927.3.23양자역학★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
1927.10양자역학◆ ★제5차 솔베이 회의. 보른–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 공동 주보고
1927.10양자역학◆ 두 사람은 새 양자역학을 사실상 ‘닫힌 이론(closed theory)’으로 제시. 같은 회의에서 드브로이의 파일럿파, 슈뢰딩거의 파동역학, 아인슈타인의 비판이 교차
1927.10양자역학★보어는 토론 과정에서 상보성을 제시.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이 양자역학 해석사의 상징으로 자리잡기 시작
1928.1양자역학디랙 방정식. 상대론과 양자역학을 결합하고 전자의 스핀을 자연스럽게 포함
1928양자역학◆ 보른, 괴팅겐 방문자들에게 “물리학은 6개월 안에 끝난다”는 취지의 발언
1928삶의 단절◆ 보른, 과로와 신경쇠약으로 연구 활동에 큰 차질
1927 솔베이에서 보른의 위치
보른은 유명한 사진 속 ‘참석자 한 명’이 아니었다. 브래그 — 콤프턴 — 드브로이 — 보른·하이젠베르크 — 슈뢰딩거로 이어진 공식 핵심 보고 가운데, 양자역학 자체를 하이젠베르크와 공동 보고한 대표 발표자였다. 즉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아니라, 확률적 양자역학 진영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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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양자역학 · 1930–1935

시점영역사건
1930천체물리찬드라세카르, 인도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상대론적 효과를 적용해 백색왜성 질량에 상한이 있다는 핵심 아이디어를 발전시킴. 이후 수년에 걸쳐 정교화
1931양자역학★디랙, 반물질 예측
1932양자역학앤더슨, 양전자 발견
1932양자역학채드윅, 중성자 발견 — 물리학은 보른이 농담했던 ‘6개월’ 안에 끝나지 않음
1932천체물리란다우, 붕괴한 별이 거대한 원자핵 같은 상태가 될 수 있다고 서술 — 중성자 발견 직전 작성된 중성자별 개념의 초기 형태
1935.1천체물리에딩턴, 왕립천문학회에서 찬드라세카르의 결론을 공개 반박
1935.5양자역학EPR 논문 —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 양자역학의 완전성에 문제 제기
1935.11양자역학슈뢰딩거 「양자역학의 현재 상황」 — 고양이 사고실험과 ‘얽힘’이라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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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단과 대이동 · 1933

1933년은 과학이 멈춘 해가 아니라, 과학자들의 지도가 찢어진 해였다.

시점영역사건
1933.3.28삶의 단절★아인슈타인, 프로이센 학술원 사임. 독일 국적 이탈 의사를 밝히고 사실상 독일과 결별
1933.4.7삶의 단절직업공무원제 재건법 시행. 유대계와 정치적 반대자를 대학·공직에서 제거하기 시작
1933.4.17삶의 단절프랑크, 1차대전 참전 경력으로 당장은 면제될 수 있었지만 공개 항의하며 자진 사임
1933.4.25삶의 단절보른, 괴팅겐 교수직 직무정지
1933.5삶의 단절◆ 보른, 독일을 떠남
1933.5삶의 단절영국 Academic Assistance Council 설립. 망명 학자들의 일자리와 정착 지원
1933.9.12핵개발실라르드, 런던 신호등 앞에서 핵연쇄반응 착상. 실제 핵분열 발견보다 5년 앞섬
1933.10.17삶의 단절★아인슈타인, 프린스턴 도착
1933삶의 단절미국의 망명 학자 지원위원회 활동 본격화
1933.12.10삶의 단절★하이젠베르크·★슈뢰딩거·★디랙이 스톡홀름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 ◆ 보른은 이미 괴팅겐을 떠나 케임브리지에 있던 시기
1934.3.24삶의 단절★아인슈타인, 나치 정부에 의해 독일 국적 박탈
괴팅겐에서 보른, 제임스 프랑크, 리하르트 쿠란트, 에미 뇌터, 에드문트 란다우, 파울 베르나이스 등이 사라졌다. 수년 전까지 세계 수학·이론물리학의 중심이었던 괴팅겐의 인적 기반이 몇 달 사이 붕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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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망명 그리고 핵분열 · 1935–1939

시점영역사건
1935삶의 단절◆ 보른, 라만의 초청으로 인도 방갈로르 체류
1936삶의 단절보른, 에든버러 대학에 정착
1937.7삶의 단절SS 기관지, ★하이젠베르크를 상대성이론·양자역학을 옹호하는 ‘백색 유대인’으로 공격
1938.3삶의 단절오스트리아 안슐루스. ★파울리의 국적 문제 악화
1938.4삶의 단절란다우, 소련에서 체포. 1년 뒤 카피차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석방
1938.7.13삶의 단절리제 마이트너, 나치를 피해 오스트리아·독일권을 탈출해 네덜란드로 넘어감. 이후 스톡홀름 정착
1938.9삶의 단절★슈뢰딩거, 그라츠 대학에서 밀려난 뒤 오스트리아 탈출
1938.12핵개발한–슈트라스만, 우라늄 실험에서 예상 밖의 바륨 생성 확인
1938.12.19핵개발한 → 망명 중인 마이트너에게 실험결과를 편지로 전달
1938–39핵개발마이트너–프리시, 결과를 핵분열로 이론적으로 해석
1939.8.2핵개발★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 실라르드가 중심이 되어 작성하고 위그너·텔러도 과정에 관여. 루스벨트에게 핵연쇄반응의 군사적 가능성 경고
1939.9.1천체물리오펜하이머–스나이더 「계속되는 중력 붕괴에 관하여」 — 현대적 중력붕괴 블랙홀 모델의 출발점
1939.9.1역사같은 날 독일,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대전 시작
실험은 독일에, 해석은 망명지에.
한과 슈트라스만이 독일에서 실험을 했고, 그 결과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독일을 떠난 마이트너와 프리시가 설명했다. 과학은 하나의 이론으로 이어졌지만 과학자들은 국경에 의해 갈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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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 1940–1945

시점영역사건
1940.3핵개발프리시–파이얼스 메모. 비교적 적은 양의 우라늄으로 폭탄이 가능할 수 있음을 계산
1940삶의 단절두 사람은 ‘적성국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기밀 레이더 연구에서 배제되어 있었고, 역설적으로 핵분열 연구에 집중할 여지가 생김
1940.7삶의 단절★파울리, 프린스턴 도착
1940.10.1삶의 단절★아인슈타인, 미국 시민권 취득. 스위스 국적은 계속 유지
1941.9핵개발보어–하이젠베르크 코펜하겐 회동. 핵무기와 전쟁을 놓고 정확히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지금도 논쟁적
1942.12.2핵개발페르미, 시카고에서 최초의 제어 핵연쇄반응 CP-1 성공
1943.3핵개발★오펜하이머,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
1943.9삶의 단절★보어, 체포 위험을 피해 어선으로 스웨덴 탈출 → 영국 → 미국. 로스앨러모스에서는 Nicholas Baker라는 가명 사용
1944.12핵개발로트블랫, 독일의 원폭 개발 위협이 사라졌다고 판단하고 도덕적 이유로 로스앨러모스를 떠난 대표적 사례
1945.6.11핵개발프랑크 보고서. 일본에 대한 원폭의 무경고 사용에 반대. 실라르드 등 참여
1945.7.16핵개발트리니티 핵실험
1945.8.6핵개발히로시마. 팜홀에 억류되어 있던 ★하이젠베르크 등 독일 핵과학자들이 라디오로 소식을 들음
1945.8.9핵개발나가사키
M

물리학자들의 대이동

독일·중부유럽 → 미국

  • ★아인슈타인 — 1933 → 프린스턴 IAS
  • 한스 베테 — 영국 경유 → 1935 코넬 → 로스앨러모스 이론부장
  • 제임스 프랑크 — 존스홉킨스 → 시카고
  • 오토 슈테른 — 카네기공대
  • 펠릭스 블로흐 — 스탠퍼드
  • 빅토르 바이스코프 — 로체스터 → 로스앨러모스
  • 존 폰 노이만 — 헝가리 → 1930 미국
  • 유진 위그너 — 헝가리 → 프린스턴
  • 에드워드 텔러 — 헝가리 → 1935 미국
  • 레오 실라르드 — 헝가리·독일 → 런던 → 1938 미국
  • 엔리코 페르미 — 1938 노벨상 시상식 참석 후 미국 이주
  • 에밀리오 세그레 — 미국 체류 중 이탈리아 인종법 시행 → 미국 잔류

영국·스웨덴·독일에 남은 사람들

  • 영국 — ◆ 보른 · 루돌프 파이얼스 · 오토 프리시 · 프란츠 지몬 · 니콜라스 쿠르티
  • 스웨덴 — 리제 마이트너
  • 독일에 남음 — ★하이젠베르크 · 오토 한 · 막스 폰 라우에 · ★막스 플랑크
사람뿐 아니라 이론도 쫓겨났다.
Deutsche Physik 운동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유대인 물리학’으로 공격했다. 1933년 이후 독일은 단순히 뛰어난 연구자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연구하던 현대 이론물리학 자체를 정치적으로 의심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망명의 사슬

실라르드 · 1933 런던 · 연쇄반응 착상
마이트너·프리시 · 1938–39 망명지 · 핵분열 해석
실라르드·위그너·텔러 → 아인슈타인 · 1939 · 루스벨트에게 경고
프리시·파이얼스 · 1940 영국 · 원폭의 현실적 임계질량 계산
페르미 · 1942 시카고 · 최초 제어 연쇄반응
베테 · 로스앨러모스 · 이론부장
1933년 이전에는 미국의 젊은 물리학자들이 괴팅겐·베를린·코펜하겐으로 배우러 왔다. ★오펜하이머 역시 1927년 괴팅겐에서 보른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5년 이후 그 방향은 거의 완전히 뒤집힌다. 유럽 → 미국으로 사람이 이동했고, 사람과 함께 연구의 중심도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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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는 사람들 · 1954–1957

시점영역사건
1954양자역학보른, 노벨물리학상. “양자역학의 근본적 연구, 특히 파동함수의 통계적 해석”
1954.6삶의 단절★오펜하이머, 보안인가 박탈
1954삶의 단절★디랙, 미국 입국·비자 문제로 프린스턴 방문이 무산됨
1955.4.11핵시대 이후★아인슈타인, 러셀의 선언문에 서명 의사를 전달
1955.4.18★아인슈타인 사망
1955.7.9반핵러셀–아인슈타인 선언 발표. 보른 포함 11명 서명
1957.4.12반핵괴팅겐 18인 선언. 보른과 ★하이젠베르크가 같은 선언문에 서명
1957.7반핵제1차 퍼그워시 회의

1920년대에 양자역학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1930년대에는 국적과 정치 때문에 흩어지고, 1940년대에는 그 물리학이 핵무기로 이어지는 것을 보았으며, 1950년대에는 다시 과학자의 이름으로 핵무기를 경고하게 된다.

N

노벨상, 그리고 걸린 시간

업적업적 시점노벨상걸린 시간
★보어 · 원자모형191319229년
★아인슈타인 · 광양자 가설19051921년도 / 1922 시상16년
★하이젠베르크 · 행렬역학19251932년도 / 1933 시상7년
★슈뢰딩거 · 파동역학192619337년
★디랙 · 상대론적 양자역학192819335년
채드윅 · 중성자193219353년
앤더슨 · 양전자193219364년
★파울리 · 배타원리1925194520년
◆ 보른 · 확률해석1926195428년
★란다우 · 초유동 이론1941196221년
베테 · 별의 에너지원1938196729년
카피차 · 초유동1938197840년
펜지어스·윌슨 · 우주배경복사1964197814년
★찬드라세카르 · 별의 구조와 진화 연구1930년대1983약 반세기
★펜로즈 · 특이점 정리1965202055년
★킵 손 외 · 중력파 관측201520172년
벨 → 클라우저 → 아스페 → 차일링거1964 → 1972 → 1981–82 → 1990s2022여러 세대에 걸친 검증
보른의 28년
하이젠베르크가 새로운 양자역학의 문법을 만들었다면, 보른은 그것이 어떤 수학적 구조인지 알아보았다. 슈뢰딩거가 새로운 방정식을 만들었다면, 보른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했다. 하이젠베르크 7년, 슈뢰딩거 7년, 디랙 5년에 비해 보른은 28년이 걸렸다. 그는 양자역학의 중심에 있었지만, 양자역학을 기억하는 서사의 중심에서는 상대적으로 비껴나 있었다.

노벨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

인물남은 이야기
★존 벨1990년 사망. 그의 정리가 이끈 실험적 흐름은 2022년 노벨상으로 이어졌지만 노벨상은 사후 수상 불가
리제 마이트너핵분열의 이론적 해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지만 1944년도 노벨화학상은 오토 한 단독 수상
조슬린 벨 버넬대학원생 시절 펄서를 최초 포착. 1974년 노벨물리학상에서 제외되고 지도교수 휴이시가 펄서 발견 공로로 수상
파스쿠알 요르단행렬역학 정식화의 핵심 공저자. 이후 나치당·SA 경력이 그의 과학사적 평가에 긴 그림자를 남김
★오펜하이머현대적 중력붕괴 연구와 맨해튼 프로젝트의 중심 인물. 여러 차례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하지 못함
★스티븐 호킹호킹복사의 결정적인 직접 관측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2018년 사망
보른은 양자역학의 가장 화려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경로를 따라가면 20세기 물리학의 거의 모든 장면을 지나게 된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을 알아본 사람.
슈뢰딩거의 파동함수에 확률을 부여한 사람.
아인슈타인에게서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편지를 받은 사람.
솔베이에서 새 양자역학이 사실상 완성되었다고 선언한 사람.
6년 뒤 그 중심지 괴팅겐에서 쫓겨난 사람.
28년 뒤에야 그 확률해석으로 노벨상을 받은 사람.
그리고 말년에는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의 이름과 함께 핵무기에 반대한 사람.

보른을 따라가면 양자역학은 교과서 속 공식에서 빠져나온다.
그 이론을 만든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국경을 넘었고, 서로 다른 선택을 했으며, 자신들의 발견이 핵무기로 이어지는 시대를 살아야 했다.